2022년 6월 18일 토요일

(피아노)레가토에 대한 고찰

- 레가토 :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것

피아노에 있어서 레가토가 엄청난 난제라는 것은 익히 들었다.
해머를 때려서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구조를 감안할 때,
현악기나 관악기와 다르게 근본적인 레가토가 불가능하기 때문.

강충모 교수님의 또모 강의에 따르면
타건 직후 점점 약해져가는 소리를 끝까지 듣고,
그 소리로부터 부드럽게 이어질 수 있는 크기로 다음 음을 타건해야 하는데,

여음을 듣는 것도 어렵고
다음 음의 힘조절도 어렵고
어려운 것 투성이다.

레가토의 선결 조건으로,
타건과 타건 사이의 소리가 비면 안되는 점을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도"와 "레" 두 음을 레가토로 잇는다면,
적어도 레를 타건하기 전까지 도 소리가 나야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도 건반을 누른 채로 손을 떼지 않는 핑거링? 또는
도 소리의 울림을 유지해주는 페달링이 필요하다.

도 건반을 최대한 누르고 있다가 레로 옮겨가는 느낌은
팔의 무게를 도 건반 위의 손가락이 지탱하고 있다가,
그 무게를 레 건반을 칠 손가락으로 이동시키는 느낌이며,
팔의 무게는 인위적이지 않게 바른 자세에서 릴렉스를 통해 건반에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2019년 1월 27일 일요일

(물구나무서기)손에 집중하기 & 배를 벽쪽으로 향하고 서기

1. 손에 집중하기
   - 몸을 일자로 만들기 위해 배와 골반, 다리에 집중하는 것보다 손에 집중하는 것이 균형을 오래 유지하는 데 더 중요해 보인다(자동차 운전 시 사이드미러 잘 봐야되지만 제일 중요한게 전방주시인 것, 우리가 똑바로 서 있을 때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발에 집중하는 것과 마찬가지)

2. 배를 벽쪽으로 향하고 서기
   - 등을 벽쪽으로 향한 벽물구나무는 코어의 긴장을 유지하기 어려워 곧잘 아치형 물구나무가 된다
   - 배를 벽쪽으로 향하고 서면 아치형이 되면 곧장 균형을 잃기 때문에 물구나무를 유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코어가 긴장하게 되서 전신 운동 효과를 보기에 더 좋아 보인다

2018년 11월 8일 목요일

(잡담)삶의 의미 2탄

아끼는 후배와의 저녁식사를 하며 나눈 이런저런 이야기들

1.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아니 그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내고,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세상에 쌓여 있는 해야만 하는 일들 중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세상이 묻고 인간이 답한다"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해야만 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면
분명 뿌듯하고 행복할 터,
그게 잘 사는 법이 아닌가 한다.


2. 내게 세상이 주고 있는 의무(?)가 참 많지만,
요샌 "의미없이 버려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시간"을 구하라"는 게 머릿속에 맴돈다.
그러면 시간이 많이 남을 거고,
그러면 세상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삶의 의미를 만끽할 시간,
아니면 그것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라도 확보할 수 있을테니까!


3. 비전제시가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아직 난 훌륭한 리더를 아무도 못 만난 것이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우리 팀장님조차, 우리 조직을 조금 더 "좋은" 조직으로 만들자고 말씀하시지만, 우리 조직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하지는 못 하고 계시니까...
세상에 리더가 있긴 할까?


짧지만 참 좋았던 저녁식사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영화후기)보헤미안 랩소디 - 당당히 맞서는 삶

귀가 호강하고, 싱크로 200% 배우들의 열연에 놀라고,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 감동할 수 있어 참 행복한 영화다.

1. 퀸의 음악은 정말... 압권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많은 곡들, 그리고 특히 귀를 사로잡았던 "Bohemian Rhapsody"와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까지, 2~3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이렇게 좋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2. 배우들이 퀸과 정말 똑같이(?) 생겼다. 브라이언 메이(퀸)와 귈림 리(배우)는 정말... 판박이라고밖에는 ㅋㅋㅋ 프레디 머큐리를 열연한 라미 말렉의 슬픔 가득한 눈동자는 정말 깊고 깊었다.

3. 이른 나이에 정상을 경험하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본모습에 당황하고 고민하던 프레디 머큐리.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픔을 겪지만 용기를 내어 진짜 "가족"에게 돌아가는 모습, 그리고 손을 내밀어주는 가족. 진정한 자기 자신의 완성 얼마 후 찾아온 죽음까지... 담담하게 그려진 그의 일대기를 보다보니 어느새 영화관에서 울고 있었다. 깊은 방황이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계속해서 용기있게 부딪쳐 나가는 프레디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안 봤으면 정말 아쉬웠을 것 같다. 지금도 거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보헤미안 랩소디가 흘러나오고 있다 ㅎㅎㅎ

2018년 10월 27일 토요일

(잡담) 삶의 의미에 대하여("빅터 프랭클-죽음의 수용소에서" 참고)

요새 때늦은 사춘기가 다시 찾아왔다.

뭘 해도 재미없고, 하고 싶은 것도 마땅히 없고,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무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도 맘에 안 들고.

저녁 6~7시 퇴근하면 그 이후부터 자기 전까지가 그나마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시간인데, 그 자유시간을 뭘로 채워야 하는건지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우울했다. 아이러니한 건, 그럴수록 "무엇을 하는 것이 의미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가장 무의미한 일-핸드폰 만지작거리기"로 시간을 다 보내고, 더욱 우울해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죄책감, 불편감을 안은 채 지내온 요 며칠. 어제는 너무 답답해서 "삶의 의미"를 구글링해보았다.

관련 도서에 대한 포스팅이 눈길을 끌었는데, 신기하게도 검색 1페이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책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이 책은 나도 매우 감명깊게 읽었던 책 중 하나로 우리 집 거실 책장에 이미 꽂혀있는 책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을 펼쳐 들었고, 너무나 절묘하게 아래의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오 이런...)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묻는데 답이 안 나와서 답답했던 내게, 그런거 물으면 안 된다는 일갈이 날아왔다. 질문을 하는 주체는 "인간(나)"이 아니라 "그 인간(나)이 살고 있는 삶"이라는 메세지와 함께 말이다.

돌이켜보면, 요즘 내 삶이 내게 던지고 있는 질문과 과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회사일만 해도 엄청난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반복되는 루틴에만 포커스를 맞추며, '저 과제는 내 과제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가정생활은 워낙 안정감 있고 변화가 적어서 과제로 느껴질만한 일이 없기도 했고.

아! 이래서 내게 사춘기가 온 거구나!

와이프와 대화하면서 생각했던 과제들, 평소 외면해왔던 과제들을 수첩에 쭉 적어내려가니, 그것만 해도 벌써 산더미다. 내 앞의 과제를 외면하지 말고,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 사춘기는 자연스레 물러가지 않을까 싶다.